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왕조 (문단 편집) === [[요안니스 5세]](1354~1376) === 1354년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요안니스 5세는 튀르크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대가로 교황으로부터 지원군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정교회를 신봉하는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만 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굴복하고 튀르크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오기 위해 서유럽 곳곳을 방문하였다. 1366년 6월, 사보이아의 아마데오 6세[*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가 이 시람의 고모였다.]는 오스만 베이국으로부터 갈리폴리 요새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에 돌려줬다. 1369년 오스만 베이국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했을 때, 요안니스는 로마로 달려가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며 제발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어느 나라도 동로마 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1371년, 세르비아 왕국은 [[마리차 강 전투]]에서 오스만 베이국에게 참패했다. 그 여파로 왕국은 붕괴하였고, 세르비아 공국들은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의 봉신이 되었다. 요안니스 5세는 이 틈을 타 세르비아로부터 세레스를 탈환하였고, 무라트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서유럽 견문을 마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요안니스 5세는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에게 억류되었다. 당시 그의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는 부황의 구원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간 억류되던 중,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사촌을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 불가리아 흑해 연안의 소조폴과 메셈브리아를 점령하고 바르나까지 공격하였다. 압박감을 느낀 알렉산더르는 평화 협상에 응했고, 요안니스 5세는 18만 플로린을 몸값으로 지불하는 대가로 풀려났다. 아메데오 6세는 메셈브리아와 소조폴을 동로마 제국에 넘기게 하였다. 요안니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안드로니코스 4세를 폐위시키고, 차남 [[마누일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이에 격분한 안드로니코스 4세는 쿠데타를 결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